아라비아 숫자의 정치학
아라비아 숫자의 정치학 – 박영훈
0, 1, 2, 3, 4, 5, 6, 7, 8, 9
세계 어디를 가도 숫자는 똑같다. 언어와 문자는 달라도 전 세계 누구나 공용하는 기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이 기호가 인류의 시작과 함께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그 누군가가 만들어 여러 사람에 의해 오랫동안 갈고 닦는 과정을 거쳐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인류의 위대한 문화유산 중 하나인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1400~1500년 전, 그러니까 우리의 삼국시대 무렵, 인도의 누군가에 의해 창조되어 아라비아로 전해져 그곳 상인들에 의해 유럽으로 전파된 것이다. 인도에서 탄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라비아 숫자라 불리는 이유는 오직 자신에게 직접 전해 준 사실만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습성 탓이라 여겨진다.
하지만 이 아라비아 숫자가 오늘날과 같이 범세계적으로 사용되는 과정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명백한 사실도 억지로 부정하는 사람들이 항상 존재하는 인간 사회가 그렇듯이, 이 위대한 창조물의 도입에도 격렬하게 저항하는 반동들의 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유럽 역사의 한 단면이지만, 당시 이들이 사용하던 수를 나타내는 기호는 Ⅰ,Ⅱ, Ⅲ, Ⅳ, Ⅴ, Ⅵ, …, Ⅹ과 같은 로마 숫자였다.
이 숫자로 ⅣⅩⅡ(42)와 Ⅴ(5)를 합하는 덧셈을 실행한다고 생각해보라. 그 순간 이 단순한 덧셈은 고도의 지적 훈련을 요하는 매우 복잡한 난문으로 바뀌지 않는가? 더군다나 자릿수가 늘어난다면, 그리고 뺄셈과 곱셈, 나눗셈까지 해야 한다면 어찌될 것인가? 이상하게 들릴지 몰라도 당시 유럽에 계산 기술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존재했음은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아바쿠스(abacus) 곧 주판(또는 셈판)을 사용한다 하여 아바시스트(abacist)라 불렀는데, 다음은 당시의 상황을 보여주는 하나의 일화다.
중세의 한 부유한 상인이 자기 아들에게 계산을 가르치기 위해 한 아바시스트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더니, 그는 이렇게 조언했다.
“만일 아드님에게 덧셈과 뺄셈을 가르치고 싶다면, 독일이나 프랑스의 아무 대학에나 보내면 됩니다. 그러나 곱셈이나 나눗셈을 가르치고 싶다면 이탈리아에 있는 대학으로 보내시오. 물론 그 아이가 그만한 능력이 있다는 전제하에서 말이죠.”
이 같은 상황에서 아라비아 숫자가 유럽에 도입됐으니, 계산 기술이라는 신화로 포장된 아바시스트들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수순이리라. 소위 전문가의 입지가 송두리째 사라질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숫자를 많이 사용해야 하는 상인들은 편리하기 그지없는 이 아라비아 숫자를 애용했지만, 나라에서는 이를 금지하는 정책을 발표하기도 했다. 로마 숫자에 비해 쉽게 위조될 수 있다는 명분을 내걸었지만 전문가라는 기득권의 영향력을 배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라비아 숫자를 둘러싼 논쟁은 200년가량 지속됐는데, 기존의 셈판 이용을 지지하는 아바시스트와 새로운 아라비아 수 체계를 선호하는 사람들인 알고리스트 사이에 진행된 논쟁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그림에 나타난 판화가 이를 상징적으로 말해준다(그림).
그림의 오른쪽에는 아바시스트를 상징하는 피타고라스가, 왼쪽에는 아라비아 숫자로 계산하고 있는 수학자 보에티우스가 등장한다. 가운데의 여신은 산술(arithematicae)을 상징하는데 보에티우스를 향해 미소 짓고 있는 것을 보면, 이 판화가 등장할 때쯤 되어, 결국 아라비아 숫자의 사용이 보편화됐음을 알 수 있다.
어쨌든 계산 과정의 기록은 물론, 그 결과에 대한 검증까지 훨씬 쉽게 할 수 있다는 실용적인 이점 때문에 상인들은 일찌감치 적극적으로 이를 사용하며 보급했던 것이다. 이들의 관심과 지지, 그리고 종이를 쉽게 구할 수 있다는 상황적 조건과 함께 자녀 교육을 지원할 수 있는 중산층 계급의 재정적 능력 등이 아라비아 수 체계를 널리 퍼뜨린 중요한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아라비아 숫자는 처음에 이탈리아에서 그리고 점차 전 유럽에서 널리 사용돼 오늘날 전 세계 사람들 누구나 공통적으로 이해하고 사용하는 기호로 자리 잡게 됐던 것이다. 아라비아 숫자와 비교하면 셈판의 사용이 얼마나 불편한가를 보면 지극히 당연한 결과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이를 금지하는 국가 정책까지 나온 사례를 보면, 어떤 새로운 진보도, 그것이 아무리 많은 사람들을 위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구습에 젖은 사람들의 의식을 변화시키는 작업이 얼마나 힘든지, 더더욱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그들의 습성이 얼마나 꿋꿋한지를 아라비아 숫자의 역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 않은가?
너무도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사용하다보니 마치 인류의 등장과 함께 존재했던 것처럼 오인할 수도 있지만, 아라비아 숫자가 전 세계적으로 사용된 기간은 300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아라비아 숫자의 전파 과정을 보며 정치에 대한 관심이 중요함을 실감했다고 하면 지나친 상상력 탓인가?
출처 :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