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전쟁 수학전쟁
박영훈 | 수학칼럼니스트
전쟁이 일어났다. 이른바 ‘역사 전쟁’이라고 하면서 아이들에게 왜곡된 역사를 가르치려 한다고 서로를 비난하고 있다. 진실을 알리기보다는 대립의 각만 날카롭게 세운 그들의 주장을 이 자리에서 새삼스럽게 논할 필요는 없지만, 학창 시절 나름대로 역사 공부를 꽤나 열심히 했다고 자부하는 필자의 심기는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왕조가 바뀌며 새로이 만든 토지제도가 어떤 것인지 뜻도 모른 채 외웠던 한자어들, 구한말 격동의 시기에 빈번하게 일어나 헷갈리기 십상이었던 여러 사건의 이름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현재 모습을 반추하거나 추론해볼 수 있는 안목을 그 시절의 역사교육을 통해 얻었다고 자신 있게 말하기는 어렵다. 민주화가 이루어졌다는 오늘의 정치가 조선 이래 중앙권력을 둘러싼 흑백논리에 물든 정치의 산물이라는 견해를 가지게 된 것은 정작 우리의 역사 교과서가 아니라 그레고리 헨더슨의 <소용돌이의 한국 정치>에서였다. 그리하여 ‘다이내믹 코리아’는 주류 사회에 끼어들기 위한 욕망을 실현하려는 한국인의 열정이 빚어낸 결과라는 생각에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우리가 민족이라는 단어에 얼마나 억압되어 있는지, 그리고 우리의 역사라는 것이 단지 우리만의 것이 아니라 이웃 나라들과의 관계에 의해 결정될 수밖에 없다는 지극히 당연한 시각을 얻게 된 것도 실은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 현대사> 덕택이었다.
내게 있어 역사 전쟁은 오로지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에 의해서만 역사 교과서가 기술돼야 한다는, 그래서 자신이 주류임을 밝히고자 하는 또 하나의 안타까운 소용돌이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 교과서에 담긴 내용만으로 아이들이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는가에 대한 성찰은 보이지 않고 자기 진영의 주장만 내세우는 ‘진흙탕의 개싸움’만 무성하기 때문이다.
역사 전쟁만 있는 것은 아니다. 1980년대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색다른 전쟁이 일어났다. 당시 미국에서는 전미수학교사협의회(NCTM)가 새로운 수학교육 운동을 주도하고 있었다. 단순반복학습에 의한 기능만을 전수하고 개념에 대한 이해와 활용 및 적용이 미흡한 수학교육을 비판하며 교과과정의 개편과 새로운 교과서의 개발이 시급하다는 주장을 펼친 것이다. 미국 국립과학재단(NSF)은 이에 호응해 기꺼이 연구비를 지급했고, 이에 따라 기계적인 연산과 공식 적용을 추방하고 문제 상황을 해결하며 수학적 개념과 공식을 발견하도록 하는 등 전통적인 수학 교과서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개혁적인 교과서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스탠퍼드대학의 교수진을 비롯해 실리콘밸리의 학부모들은 이에 반발해 전통적인 교과서의 사용을 청원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이 운동은 뉴저지 주의 프린스턴, 텍사스 주의 플라노, 그리고 뉴욕 시로 확산됐다. 이들의 갈등을 당시 언론에서는 ‘수학 전쟁’이라 일컬었다. 외부에서는 이를 두고 문제 해결 능력과 기본 기능의 대결, 진보주의와 전통주의의 대결 등으로 단순하게 묘사했지만, 그 이면에는 교육의 주도권을 둘러싼 정치적 파워 게임이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었음이 분명하다.
지금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역사 전쟁’과 30여년 전 바다 건너편에서 일어난 ‘수학 전쟁’을 바라보면서 한 가지 사실은 분명히 깨닫게 된다. 교과서 내용이 교사와 학생 모두가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 말은 아이들에게 “학교 가서 선생님 말씀 잘 들어야 해”라고 말하거나 입시철이면 어김없이 반복되는 “교과서 내용만 잘 소화하면 충분합니다”라는 당국의 말을 철석같이 믿는 이들에게는 허무맹랑한 망발로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엄연한 사실이다.
교과과정과 그에 따른 교과서는 분명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다. 따라서 만든 사람의 관점과 철학이 반영될 수밖에 없는데, 바로 그 누구에 의해 얼마나 합리적인 내용을 담고 있느냐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가치중립적 학문으로서의 수학도 예외는 아니다. 어떤 수학을 어떻게 구성하여 제공하느냐의 문제가 결코 가치중립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나라 초등학교 1, 2학년 아이들은 세계에서 가장 무겁고 가장 두꺼운, 그리고 세계 최초이자 유일하게 소위 ‘스토리텔링 수학’이라 해서 동화가 수록된 수학 교과서로 공부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스토리텔링 수학이라는 것이 한국에만 사용되는, 한때 유행했던 말을 빌려 거칠게 표현하자면 ‘듣보잡’이라는 것이다. 교과서 집필자들조차 “나는 스토리텔링에 동의한 바가 없으며, 다만 수학적인 내용만 채울 뿐이다”라고 말하면서도 계속 참여하는 것을 보면 중심부를 향하는 또 하나의 소용돌이를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어쨌든 이렇게 해괴한 일이 매번 계속 벌어지는 이유는 교과과정의 수립과 교과서 제작에 있어 국가 독점에서 찾을 수가 있다. 교육과정을 개정하며 “개봉 박두, 기대하시라!”와 같이 변죽만 울리고 보안에만 신경 쓰고 있으니, 정작 달은 가리키지 않고 손가락만 쳐드는 꼴이다. 그래서 전쟁은 필요하다. 이 땅에서 수학 전쟁은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 아이들과 교사를 위해서, 나아가 백년 교육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출처 :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