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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합’이 사라진 수학

우사84 2014. 1. 20. 14:06

[과학 오디세이]‘집합이 사라진 수학                             박영훈 | 수학칼럼니스트

40년 동안 학교에서 가르치고 배워왔던 수학이 느닷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1973년부터 교육과정에 포함돼 중학교에 입학하면 첫 수학시간에 배우던 집합이 사라진 것이다. 지난해부터 중학교에서는 더 이상 집합을 접할 수 없게 됐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무한이라는 개념에 어떻게 접근할 수 있는가를 탐구하는 분야가 집합론이다. 이 아이디어는 게오르크 칸토어라는 독일의 천재가 제시하고 나서 20세기에 접어들기 직전 수학의 모든 분야를 아우르는 근본 토대가 됐다. 하지만 이제 우리의 중학생들은 교과서에서나마 칸토어의 천재성을 접할 수 있는 기회마저 상실하게 됐다. 이유가 뭘까. 지금까지 교육과정과 관련된 교육부의 행태로 볼 때 이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다만 수학교육의 선진화라는 구호와 학습량 경감이라는 획일적 잣대에 의해 삭제되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그렇다 하더라도 왜 하필 집합이었을까. 의문은 풀리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수학자와 교육학자 그리고 교사들 중 누군가 이와 같은 의문을 품고 이의를 제기했다는 소식은 아직 없다. 교과서 저자들은 절대로 그럴 수가 없다. 100명 정도인 개정 교과서 저자들은 집필과정에서 집합이라는 단어는 물론 관련된 내용을 묵묵히 삭제하며 교육부의 지시를 충실히 따랐을 것이다. 사실 일반인들의 예상과는 달리 교과서 집필을 창작 행위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 필자의 교과서 집필 경험에 비추어본 결론이다. 교과서는 이미 제시된 집필 기준에 의거해 정해진 순서를 한 치도 어긋남이 없이 그리고 정해진 용어도 빠짐없이 넣어야하기 때문에, 하나의 책을 집필했다기보다는 정해진 틀에 맞추어 채워 넣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이때 교과서를 사용해 가르치고 배우는 교실 상황의 교사와 학생들보다는 검정위원회의 위원들을 의식하는 경우가 더 많다.

 

이런 관점에서 최근 불거진 역사교과서를 둘러싼 갈등의 근원을 좀 더 다른 시각에서 재조명해볼 수가 있다. 어느새 우리 귀에는 국정, 검정, 편수 등의 교육과정과 교과서 정책과 관련된 행정 용어가 익숙하게 들린다. 하지만 이 단어들이 어딘가 수상쩍다는 느낌을 준다. 우리가 만든 말이 아니라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이 땅에 자신들의 교육정책을 강제하며 사용한 용어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왜 그리고 어떻게 이런 용어들이 필요한 교육제도를 만들었는지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이 용어들이 꿋꿋하게 존재한다는 사실, 사용하는 주체만이 달라졌다는 점만 지적하자.

 

내 아이의 미래를 위해 무엇을 가르치고 배울 것인가라는 중대한 사안을 국가라는 이름하에 몇몇 사람이 결정하고 통제한다는 사실을 그냥 받아들여도 되는 것인가. 합격과 불합격으로만 분류되는 검정제도는 합리적인 제도일까. 불합격인 경우에 저자들이 그 이유를 묻거나 이의를 제기할 길이 없다는 점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동굴의 우상을 언급하며 플라톤이 말하지 않았는가. 애초부터 캄캄한 동굴에서 태어나 그곳에서만 일생을 보낸 사람은 햇빛의 존재를 알 수가 없으며 이 세상이 캄캄하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고. 국정 또는 검인정 제도를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오직 그렇게 만들어진 교과서로만 교육을 받았기 때문인 것은 아닌가. 하지만 이를 근대화된 문명국가의 교육제도라 간주하는 것은 무지의 소치이다. 교육 내용은 국가가 통제하고 부담은 국민이 지도록 하는 이 괴물은 서양의 근대적인 교육행정 체계와는 역전된 것으로 메이지 유신에 의해 탄생한 일본 제국주의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집합론을 창시한 칸토어는 무한에 대한 아이디어가 당시로서는 혁신적이어서 주위로부터 쏟아지는 질책과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여생을 정신병원에서 보내게 되었지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온몸으로 세상에 맞섰다.

 

수학의 본질은 바로 자유에 있다.”

 

지식이 권력이며 권력이 곧 지식이 되어 억압의 기제로 작동하는 것은 사람을 동굴에 가두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이에 익숙해지면 자유를 찾기보다 자유로부터 도피하는 것을 택하게 될 것이며, 결국 사라진 집합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출처 :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