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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책, 인류의 책

우사84 2014. 1. 5. 01:23

[과학 오디세이]올해의 책, 인류의 책

 

박영훈 | 수학칼럼니스트

 

굳이 의식하지 말고 담담하자고 거듭 다짐했지만, 또 한 해가 저물어 감을 알려주는 연례행사들의 친절을 어떻게 무시할 수 있을까. 그 중 하나인 올해의 책선정에 눈이 간다. 많은 사람의 의견을 모아 선정한다고 하니 십중팔구는 소위 베스트셀러가 선정될 것이다. 하지만 베스트셀러가 아니어도 우리들에게 커다란 울림을 준 책이라면 이 또한 올해의 책에 선정되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이런저런 생각에 문득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리고 가장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한 인류의 책을 꼽는다면 어떤 책일지 궁금해졌다. 그리 어렵지 않게 <성경>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렇다면 <성경>을 제외한 다른 책을 선정한다면? 답은 수학책이다. 유클리드의 기하학 책 <원론(Elements)>이다. 성경보다 더 오래 전인 고대 그리스 시대에 집필됐지만,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인쇄술에 의해 1482년에야 초판이 발행된 것으로 간주하더라도 이후 1000쇄 이상은 족히 출판된 베스트셀러이다. 그뿐만 아니라 현재 전 세계 기하학 교과서의 내용은 <원론>을 재구성한 것이다.

 

<원론>의 수학적 지식은 이미 대부분 유클리드 이전에 알려진 것들이니 유클리드만의 책이라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더구나 삼각형의 합동이나 다각형의 넓이 구하기와 같은 내용은 실용성도 떨어진다. 오늘날에는 컴퓨터를 이용하거나 삼각함수 또는 해석기하학과 같은 다른 분야의 원리를 적용하면 더 수월하게 기하학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원론>을 인류의 책이라 주장하는 근거는 책에 담겨있는 기하학 지식보다는 내용을 전개해가는 형식과 구조의 독창성이 돋보여서이다.

 

제목부터 예사롭지 않다. 원론(elements)이라는 단어는 하나의 물질을 이루는 기본 단위로 더 이상 분해할 수 없는 원소라는 뜻이지만 궁극적인 기본적 원리라는 의미로 해석해도 무방하다. 기본적 원리 이해를 위해 수영이나 유도, 골프와 같은 스포츠를 떠올려보자. 처음 시작할 때 배우는 기본자세는 스포츠 경기에서 매우 중요하다. 경기 상황이 복잡하게 전개되면서 다양한 응용 기술이 필요하지만, 결국 이들 모두는 기본 동작에서 파생된 것에 불과하다. ‘골프 황제타이거 우즈도 슬럼프 극복 훈련을 할 때 기본자세의 교정에 주력했다. <원론>은 수많은 수학 지식 중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만 뽑아서 정렬했음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선택하고 제시할 수 있었을까. 유클리드의 독창적인 공리체계라는 방법론이 독보적인 전개 형식이지만 이를 여기서 상세히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다만 수학이라는 학문을 하나의 거대한 건축물이라 가정해보자. 이 어마어마한 건축물을 지탱하는 것이 오직 다섯 개의 주춧돌이라면 놀랍지 않은가. 공리 또는 공준이라 부르는 이 주춧돌 위에 벽돌을 하나하나 쌓아 올라가는데, 여기에는 강철 같은 논리가 필요하다. 이미 쌓인 벽돌 위에 새로운 벽돌을 놓을 때에는 그 어떤 미세한 작은 틈도 허용되지 않도록 견고하게 밀착하여 연결해야만 한다. 이렇게 완성된 전체 건축물은 당연히 처음에 놓였던 주춧돌만큼 견고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원론>을 통해 논리적이고 자기 충족적인 하나의 체계가 어떻게 완성되는지 그 건축과정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주어진 체계 안에서 모순되는 것이 없는 완벽한 체계, 바로 이 공리적 체계 때문에 수학의 기본이자 본질을 확인하고 더 나아가 아름다움마저 만끽할 수가 있다. 이로써 <원론>은 수학뿐만이 아닌 다른 학문의 기본 체계가 어떠해야 함을 보여준 걸작이 됐다.

 

그런데 그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을까. 그가 살았던 시대를 좀 더 살펴보자.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고대 그리스 사회가 가정(oikos)과 도시(polis)로 분리되었다고 주장한다. 당시의 가정이라는 사적 영역은 생존이라는 필연성을 충족하기 위해 강제와 폭력이 정당화될 수 있었다. 반면에 폴리스 즉 도시라는 공적 영역은 사적 영역과 분리된 정치적 공간이다. 정치적 공간, 즉 공적 영역에서 생활한다는 것은 힘과 폭력을 사용하여 사람을 강제하며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말과 설득을 통해 결정하는 것을 뜻한다.

 

유클리드의 <원론>은 이런 배경에서 태어났다. 그는 주춧돌을 쌓아 올리며 힘과 폭력이 아닌 설득을 위한 하나의 방법론을 제시했던 것이다. 전제적 권력을 휘두르는 사적인 영역과 대립하여 공적인 영역에서 거짓된 모순이 없고 일관성 있는 논리가 어떻게 펼쳐지는가를 보여준 것이다. 석탄을 캐다가 금맥을 발견한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의 공적 영역을 <원론>으로 살펴보면 어떨까.

 

출처 :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