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오디세이]수학과 과학의 건축학 개론 박영훈 | 수학칼럼니스트
수학과 과학 세계에서 지식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건물 건축에 비유할 수 있다. 새 건물을 지었다가 허물고 그 자리에 또는 옆 자리에 또다시 새로운 건물 올리기가 거듭되는 것이 그 세계의 역사이니 말이다.
예를 들어 고대 그리스에 세워진 아리스토텔레스의 역학이라는 번듯한 건물은 상당히 오랫동안 버텨왔는데, 17세기에 접어들어 내부에 균열이 발견되는 등 건물 자체가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는 아주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된다. 마침내 어쩔 수 없이 이 건물은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는 뉴턴의 역학이라는 새로운 건물이 들어섰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그 옆 자리에는 상대성이론이라는 아인슈타인의 새로운 빌딩이 들어서 왠지 볼품없는 건물로 전락하고 말았다.
천문학의 경우에도 아주 오래전부터 프톨레마이오스가 설계한 건물이 버티고 있었지만, 이 또한 시간이 흐르며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라는 새로운 빌딩에 자리를 내주는 우여곡절을 겪는다.
과학의 역사에 점철되어 있는 이러한 일련의 건축 양상을 과학철학자 토마스 쿤은 ‘패러다임의 변화’라 했다. 여기서 패러다임은 과학자 사회의 구성원들에 의해 공유되는 신념, 가치, 기술 등을 망라한 총체적 집합을 뜻한다. 그러니까 토마스 쿤에 따르면, 과학 발전이 하나의 건물을 완성하기 위해 기존의 벽돌 위에 새로운 벽돌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듯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패러다임이 바뀌면 세계도 바뀐다’는 그의 주장에서 나타나듯 과학혁명으로 표현할 수 있다. 그러니까 과학혁명은 원래 있었던 건물을 보수하거나 증축하기보다는 아예 건물 전체를 통째로 허물어 버리고 새로운 양식의 건물을 설계하고 건축하는 재개발 과정에 비유하는 것이 보다 적절한 것 같다.
수학의 세계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수학 세계의 구성원들에 의해 공유되는, 과학에서의 패러다임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존재할까. 수학을 공리적 체계라 표현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모든 수학적 원리는 증명 없이 자명한 참이라고 가정한 몇 개의 공리를 토대로 형성되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어 유클리드 기하학이라는 수학의 신전은 다섯 개의 공리를 토대로 반듯하게 세워진 건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설계 당시에 공리라 부르는 다섯 개의 주춧돌이 무려 2000년간 이 거대한 신전을 지탱해 왔던 것이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다섯 번째 주춧돌에서 균열이 발견되면서 사람들이 점차 하나둘씩 이 건물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급기야 이들은 그 옆에 새로운 주춧돌을 토대로 새로운 빌딩을 설계해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비유클리드 기하학이라 불리는 새로운 디자인의 거대한 건물이 유클리드 기하학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것이다. 새로이 완성된 건물의 입주자 중에는 아인슈타인이라는 유명 인사의 이름도 들어 있다.
과학과 수학 세계의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패러다임과 공리가 없다면 어떤 건물도 세울 수 없다는 사실은 실제 사람들의 삶이 전개되는 사회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예를 들어, 차선이 하나밖에 없는 도로에서 운전할 때 저 멀리 반대편 차선에서 다가오는 자동차 한 대를 발견한다고 하자. 물론 상대편 운전자가 어떤 성격의 누구인지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럼에도 도로 한가운데 그려진 노란 중앙선을 지킬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에 이를 의식하지 않고 내 차선만을 따라 운전을 하게 된다. 차선이라는 교통 제도와 관련 법규를 서로 공유하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만일 이에 대한 신뢰가 의심스럽다면 더 이상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일상적 삶은 수학과 과학의 공리와 패러다임과 같은 서로 공유된 법과 제도에 의해 전개된다.
그런데 최근 우리의 사회라는 이 건물을 설계·건축하고 유지·관리하도록 위임했던 ‘그 누군가’의 정체를 낱낱이 알게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렇다고 우리는 이를 과감히 허물거나 다른 곳에 새로운 건물을 지어 떠날 수 있는 수학자와 과학자들처럼 자유로운 처지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죽으나 사나 대한민국이라는 건물에 남아 처분만 기다릴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런데 잠깐. 혹시 우리가 위임했던 ‘그 누군가’들은 이미 이 건물의 위험성을 미리 파악했던 것은 아닌가. 그래서 애지중지하는 자신들의 자녀와 함께 언제든 떠날 준비를 마친 것은 아닌가. 더욱더 엉망진창이 되어감에도 불구하고 책임지는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별 생각이 다 든다. 정말 시절이 하수상하다보니 건물을 떠날 수 없는 보통 사람들은 음모론까지 떠올리는 한심하고 비참한 상황에 놓이게 된 것 같다.
출처: 경향신문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4&oid=032&aid=0002478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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